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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남광주 시장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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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방활력연대 작성일 21-04-05 08:50 조회 58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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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광주 시장 연가
2021년 04월 05일(월) 광주일보

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

백화점은 아무래도 물건이 중심이다. 사람보다 손님 주머니 속에 든 돈을 더 중시한다. 내부도 잘 드러나도록 상품 중심으로 꾸며져 있고, 사람들은 그 상품을 중심으로 모이고 흩어진다.

시장은 물건을 주고받는 점에서는 같지만, 누가 보아도 사람이 중심이다. 백화점이 물건 사이를 헤치고 다니면서 상품을 찾는 곳이라면, 시장은 사람 사이를 누비고 다니면서 상품을 찾는 곳이다. 백화점은 고기는 있으나 푸줏간이 없고, 생선은 있으나 비린내가 없으며, 망치와 호미는 있으나 대장간이 없는 곳이다. 옷과 구두는 넘쳐나나 재단사와 수선공이 없으며 양주·맥주 없는 술이 없을 정도이나 진정 노랫소리가 없는 곳이다. 백화점이 없는 물건이 없는 곳이라면 시장은 없는 사람이 없는, 남녀노소 빈부 여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있는 곳이다.
 
가공되고 포장된 백화점과 달리 남광주 시장에는 살아 있는 것들이 오고 간다. 언제나 머리 고기가 펄펄 끓고 생닭이 튀겨진다. 검붉은 흙이 묻은 도라지나 쪽파가 손님을 기다리고, 보성·완도에서 올라온 주꾸미와 신안 바다에서 뛰놀던 병어, 오리·닭이 산 채로 거래된다. 멀쩡한 것보다 어디 한쪽이 좀 깨진 양파나 감자가 더 많이 널브러져 있는 곳이다. 물건에 상표도 가격도 없지만 서로 입과 입을 통해 사는 이나 파는 이 모두 불만 없이 물건을 주고받는다. 때론 고성도 오가지만 흥정이 끝나면 유들유들해지고 단골이 되어 더욱 관계가 단단해지는 곳, 족발 굽는 냄새와 튀밥 튀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 날이 저물면 한두 명쯤 몸을 비틀거리며 떠나가고, 어둠 너머로 막걸리 냄새가 풍겨 오며 남행열차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남광주 시장이다.
 
남녘 고흥과 장흥 보성에서 시내로 오는 도로가 남북으로 이어져 있고, 목포와 나주, 해남에서 광주역으로 가는 기차가 동서로 이어져 만나는 십자로 바로 옆 남광주 시장. 지금은 사라졌지만 기차가 지나갈 때면 광주와 화순을 잇는 넓은 도로에 차단기가 내려졌고 긴 꼬리를 흔들며 기차가 지나가면 혹여 아는 사람이 타고 있을까 찻간의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곤 했다. 간수가 서둘러 차단기를 올리면 차들은 건널목을 바삐 지나갔다.

그랬다. 그 기차는 남광주역에서 가장 오래 멈춰 섰다. 열차가 희붐한 입김을 토해내면 새벽에 올라온 사람들이 남녘 바다에서 건져 올린 싱싱한 수산물과 들녘에서 애지중지 가꾼 농산물들을 머리에 이고, 지게꾼들은 지게에 실어 내렸다. 남광주 시장은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광주의 유일한 기수역(汽水域)이었다. 갯내 나는 사내와 흙내 나는 아낙이 만나서 꼬막 안주에 구성지게 육자배기를 부르며 삶의 애환을 노래하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오랫동안 헤어졌던 친척도 만나고 원수같이 쫓기던 첫사랑도 만나는 곳이다. 뜻밖에 친정어머니를 만나면 딸은 꼭 감춰둔 비상금을 주머니에 몰래 찔러 주고, 어머니는 딸 손을 잡고 국밥집으로 가기 바쁜 곳도 이곳이다.
남광주 시장 얼굴은 뭐니 뭐니 해도 홍어와 낙지다. 홍어는 코를 찐하게 쑤시며 다가오고, 낙지는 혀에 척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사시사철 빠지지 않고 좌판을 차지하고 있는 홍어와 낙지는 질긴 남도 사람들을 영락없이 닮았다. 몇 걸음 들어가면 진한 욕설과 농담이 있고, 노랫소리와 웃음꽃이 수시로 만발하는 가게들이 지척이다.

남광주 시장은 5·18 때 접전지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대병원 꼭대기에 M60기관총을 설치하고 시민들 동향을, 건널목과 시장 사람들을 24시간 감시한 곳이었다. 도청을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사람들이 더는 물러설 수 없는 보루이자 경계, 낮에는 시민들이 밤에는 공수부대원들이 점령했던 치열한 현대사의 거점이었다.

또한 이곳은 내 청춘이 있는 곳이다. 야자를 마치고 버스에서 내리면 밤 11시, 사위는 온통 깜깜했다. 자취를 했던 터라 집에 가면 반길 사람도 없었고, 연탄불은 꺼져 냉방일 터 걸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때마다 흩날리는 눈발 속에 시장 입구, 반짝이는 카바이드 불빛이 날 흔들었다. 부나방처럼 두 손을 호호 불고 포장마차로 들어가면 아이를 등에 업은 젊은 아낙이 늦도록 장사를 하고 있었다. 100원에 안주를 곁들여 소주 두 잔, 담배 한 개비를 주었다. 처음으로 혼술한 곳도 담배를 피운 곳도 이곳이다. 난 그렇게 혼자 술을 마시며 내면으로 성숙해졌고, 피비린내 나는 5월을 잊으려고 머리를 쥐어짰으며, 쓰디쓴 담배 연기를 내뿜어서 자꾸 덧나려는 5월의 상처가 아물도록 몸부림을 쳤다. 그렇게 고단한 청춘을 건넌 곳도 남광주 시장 건널목이었다.

남광주 시장도 많이 변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힘센 낙지가 손님을 기다리고 홍어 냄새가 지나가는 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주말에는 무등산에 갔다가 남광주에 들러 사람 냄새 좀 맡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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